그들만의 세상

리뷰

개봉일: 1996년 10월 19일
감독: 임종재
각본: 조명주, 임종재
연출: 임종재
장르: 범죄, 드라마
제작사: 태흥영화사
상영시간: 106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 이병헌: 러브 역
  • 정선경: 춘향 역
  • 유오성: 백준 역
  • 박근형: 아버지 역
  • 송옥숙: 엄마 역
  • 정진영: 조직 보스 역

1995년 가을, 영화관은 동네 어른들이나 가끔씩 가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 형 손에 이끌려 동네 작은 극장으로 들어갔을 때, 운명처럼 만난 작품이 있었다. 바로 임종재 감독의 영화,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였다. 솔직히 그때는 이병헌이 누군지, 최진실이 누군지조차 잘 모르던 시절이었는데도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가 머리에 박혀버렸다.

영화 속 주인공 김종두(이병헌)는 평범하게, 하지만 작가라는 낭만적인 꿈을 품고 살던 청년이었다. 현실의 벽을 느끼고 여자친구 주영(최진실)의 권유로 결국은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되었지만, 그에겐 직장생활이 썩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불편해 보였다. 오죽하면 화면 속 그의 표정이 내 기억 속에 깊이 박혀 있을까. 영업 실적이라는 차가운 숫자 앞에 매번 작아지는 종두의 모습에서, 언젠가 내가 직장인이 되었을 때 겪을지 모를 고통이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영화가 그저 개인의 고단함만을 다룬 작품이었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오히려 당시에 대한민국 사회가 품고 있던 복잡한 감정의 결을 그대로 보여준 데 있었다. 바로 그 숨 막히던 시절, 우리가 잊어버리려고 했던 무기력과 분노의 정서를 거침없이 드러낸 것이다. 사무실에서 겪는 부당한 상사의 압박, 동료들과의 미묘한 갈등, 실적 위주의 잔혹한 현실. 이 모든 것들이 작품 안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었다.

영화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은, 김종두가 예비군 훈련 도중 실탄을 훔쳐 직장 동료들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이다. 극단적이지만 그 장면은 어쩌면 일상의 분노가 쌓이고 쌓여 극단적으로 폭발할 수도 있다는 경고 같았다. 그리고 그 무거운 주제를 감독은 기막힌 코미디적 요소와 결합시켜 더욱 강력하게 표현해냈다. 웃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저려왔던 이유가 아마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이병헌의 연기도 단연 돋보였다. 젊었던 그의 얼굴엔 어딘지 모를 어설픈 순수함과 함께 짙은 그림자가 있었다. 그때 그의 눈빛이 보여준 불안과 갈등은, 이후 배우로서 그가 보여줄 복잡다단한 인물 연기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최진실의 당차고 사랑스러운 매력도 영화의 무게감을 적절히 덜어주며, 관객들에게 숨 쉴 틈을 제공했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같은 고민, 같은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영업실적 대신 SNS 팔로워 숫자가 우리를 옥죄고, 상사 대신 네티즌의 평가가 스트레스를 준다. 결국 우리는 시대만 달라졌을 뿐, 본질적으로 여전히 같은 문제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생각한다. 만약 지금 이 영화가 리메이크된다면 어떨까. 아마 종두는 SNS 속 숫자와 평판에 집착하며 불안과 분노를 키워가겠지. 그리고 우린, 그런 종두에게 여전히 공감하고 마음 아파하며, 동시에 씁쓸하게 웃을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나서던 나에게 형은 이렇게 말했다. "야, 나중에 어른 되면 알게 될 거야. 인생이 저 영화처럼 참 미치게 만들 때가 많다는 거." 솔직히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흘러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형의 말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지금 다시 이 작품을 꺼내 본다면, 웃다가 갑자기 씁쓸해지고, 또 눈물도 흘리게 될 것 같다.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통하는 보편적이고 강렬한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는 시대를 초월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당신의 삶에도 이 영화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다. 영화라는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은 행복한가, 아니면 종두처럼 누군가에게 소리치고 싶을 만큼 힘든 상태인가. 오늘 하루쯤은 당신이 스스로를 미치게 하는 것들이 뭔지 생각해보길 권한다. 이 영화처럼.

이슈 및 관객 반응

이슈

  1. 파격적인 노출 장면: 이병헌과 정선경의 과감한 베드신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정선경은 노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결국 배역에 대한 욕심으로 노출 연기를 감행했습니다.
  2. 공연윤리위원회의 수정 요구: 영화 개봉 전 공연윤리위원회(공륜)가 세 장면에 대해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이 장면들은 상상 속 정사 장면, 여관방의 정사 장면, 남자 주인공이 칼에 찔려 피가 터져 나오는 근접 촬영 장면이었습니다.
  3. 사전 검열 위헌 판정 이후 첫 무삭제 개봉: 1996년 9월 말 공륜의 수정 지시를 받았으나, 10월 초 공륜의 심의권이 없어지면서 1996년 10월 7일에 무수정 심의필증을 받고 10월 19일에 원래대로 개봉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사전 검열 위헌 판정 이후 첫 무삭제 개봉 영화로 기록되었습니다.
  4. 정선경의 실제 머리 자르기: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정선경은 실제로 자신의 머리를 잘랐습니다. 이는 배우의 열정과 몰입도를 보여주는 사례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5. 높은 제작비: 대우에서 13억 원의 제작비를 투자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투자였습니다.

관객 반응

  1. 이병우의 사운드트랙이 호평을 받았습니다.
  2. 파격적인 묘사와 수위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3. 임종재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일부 관심을 받았습니다.
  4. 기대치를 밑도는 구성으로 평단에서 시큰둥한 반응을 얻었습니다.
  5. 관객들의 외면을 받아 서울 관객 50,544명 동원에 그쳐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6. 연출의 개성이 실종되어 이야기의 바닥만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7. 왕가위, 타란티노의 스타일을 줏대없이 따라한 아류작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8. 감각적인 묘사에 치중하여 배역의 설정이 얄팍해졌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9. 대사 처리의 미숙함과 영화의 짜깁기 스타일로 인해 연기와 배역이 민망해지는 순간들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비슷한 스타일의 영화

  1. 《비트》 (1997)
    서울 변두리의 불량 청소년 민(정우성)은 우연히 만난 동갑내기 여자 친구 애리(고소영)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민은 폭력조직에 연루되어 있고, 애리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등 두 사람의 관계는 순탄치 않습니다. 영화는 9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과 젊은이들의 방황, 그리고 격정적인 사랑을 그려냅니다.
  2. 《넘버 3》 (1997)
    조직 폭력배 3인방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조직의 3인자 태구(한석규)는 승진을 꿈꾸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그의 부하 조항(송강호)은 배우가 되기를 원하고, 또 다른 부하 현식(박상면)은 사업가를 꿈꿉니다. 이들의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 그리고 조직 내부의 권력 다툼을 블랙 코미디로 그려냅니다.
  3.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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